롤랑의 노래, 서사시
- 역사문화전설/신화전설일화
- 2020. 6. 19. 20:24
롤랑의 노래, 서사시
'롤랑의 노래'는 11세기 말 작품으로 기사의 영웅담에 관한 서사시다. 중세 유럽의 봉건시대는 기사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는데, 롤랑의 노래는 이상적인 기사를 형상화한 것일 수도 있다.
롤랑의 노래는 역사적인 배경은 8세기 후반 프랑크 제국과 아랍 세력인 사라센과의 전투였다. 당시는 중세 유럽은 유럽으로 진출하려는 아랍 세력과 끊임없는 충돌이 있었던 시기였다. 8세기 후반의 역사적 사건을 3세가 지난 11세기에 쓰인 '롤랑의 노래'는 역사적 사실에 어떤 목적이 가미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 서사시는 역사적 사실의 진실성이나 어떤 의도성을 떠나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음이 있다.
'롤랑의 노래'는 프랑크 제국의 샤를마뉴가 에스파니아(지금의 스페인, 포르투갈 일대)에 진출해 있는 아랍계 사라센과의 전쟁 이야기다. 8세기 말 프랑크 국왕 샤를마뉴(라틴어 카롤루스 대제)는 유럽 대부분을 정복하여 서로마제국의 영토를 거의 회복했다. 그러나 샤를마뉴는 에스파니아 대부분을 점령했지만 사라센의 '마르실 왕'이 지배하는 이곳 '사라고스'만을 남겨두고 7년째 전쟁을 하고 있었다.
이즈음 사라센 쪽에서 복종을 맹세하는 항복을 제의해 왔다. 샤를마뉴는 회의를 했다. 사라센의 항복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정복할 것인가를. 이때 용맹스러운 기사 롤랑은 정복하여 아예 사라센의 뿌리를 뽑아버려야 한다고 했고, 롤랑의 용맹을 시기하던 가늘 롱은 평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샤를마뉴는 평화안을 채택했다.
평화조약에는 가늘롱이 가게 됐다. 사라고스에 가서 임무를 완수한 가늘 롱은 마르실 왕과 모의했다. 가늘 롱이 마르실 왕에게 말하기를 프랑스가 사라센과 전쟁을 하게 되는 까닭은 롤랑 때문인데 롤랑을 제거하면 사라센은 프랑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롤랑을 제거하는 방법은 프랑크 군이 귀국하게 되면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 겨우 한 사람씩 지나야 하는 외길이 있는데, 그 후미를 롤랑으로 하여금 지키게 할 것이니 본대가 다 지나고 롤랑의 부대만 남았을 때 롱스보라는 곳에서 롤랑을 치라는 것이었다. 이에 마르실 왕은 그렇게 하기로 동조했다.
프랑크 군은 귀국을 하게 되고, 피레네산맥의 외길을 지날 때 샤를마뉴 왕은 롤랑에게 1만 명의 병사로 후미를 지키게 했다. 처음에 샤를마뉴 왕은 롤랑을 아끼는 마음에 선뜻 내키지 않았으나 롤랑이 자원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친구 11명이 같이 남겠다고 지원을 했다. 그래도 왕은 불안한 마음에 롤랑에게 뿔피리를 건네면 말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이 뿔피리를 불어라. 내가 바로 달려오겠다."
프랑크군의 본진이 외길을 다 통과하고 롤랑의 부대만 남게 되었을 때 사라센의 30만 대군이 몰려왔다. 롤랑의 친구 오리비에는 빨리 뿔피리를 불어 대왕에게 알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롤랑은 친구의 제의를 거절하고 적과 싸우기로 결심했다.
롤랑과 그의 친구들과 그리고 병사들이 용감히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다. 롤랑의 병사들이 다 죽고 경우 60명만 남게 되었다. 롤랑은 그제서야 뿔피리를 불었다. 샤를마뉴 대왕은 뿔피리 소리를 듣고 지나친 외길을 황급히 되돌아 달려왔다. 그러나 때는 이미 한참 늦은 후였다. 한 명의 생존자도 없이 모든 병사, 롤랑의 친구들, 그리고 롤랑도 이미 장렬히 전사한 후였다.
샤를마뉴 대왕은 사라센인들을 추격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롱시보로 돌아왔다, 그리고 모든 전사들을 정중히 매장하고 가늘 롱을 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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